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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가타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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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1836년에 태어나 1893년에 사망한 일본의 무사이다. 그는 아이즈 번의 번주이자 교토 수호직을 역임하며 막부 말기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2년 교토 수호직에 임명되어 존황양이파를 견제하고 신센구미를 조직하여 치안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신정부에 저항하여 아이즈 전쟁을 이끌었으나 패배하였고, 이후 닛코 도쇼구의 궁사를 지냈다. 그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다양한 문학 작품과 드라마의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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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가타모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교토 수호직 시대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교토 수호직 시대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본명마쓰다이라 가타모리 (松平容保)
출생1836년 2월 15일
사망1893년 12월 5일
묘소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 히가시야마마치 마쓰다이라 가 원내 어묘
도쿄도 신주쿠구 쇼주인
관직
관위종4위하 시종
와카사노카미
히고노카미
좌근위권소장
좌근위권중장 정4위하
참의
막부에도 막부 교토 수호직
육군총재
군사총재직
메이지 유신 이후닛코 동조궁 궁사
주군도쿠가와 이에사다
이에모치
요시노부
무쓰 아이즈번 번주
가문
씨족다카스 마쓰다이라 가 →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
가족아버지: 마쓰다이라 요시타쓰
어머니: 고모리 요시타카의 딸, 지요
양아버지: 마쓰다이라 가타타카
형제자매형: 도쿠가와 요시카쓰, 다케나리, 도쿠가와 모치하루
동생: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요시타케
의붓 누나: 아키히메
배우자정실: 마쓰다이라 가타타카 딸, 도시히메
측실: 사쿠, 나가
자녀가타하루
다케오
야마다 히데오
마쓰다이라 쓰네오
모리오
미야
호타마인
양자마쓰다이라 노부노리
생애
에도 시대어릴 적 이름: 게이노스케(銈之丞)
개명: 가타모리(容保)
법명유도, 호잔
신호주세이 레이신
주요 경력
아이즈 번제9대 다이묘 (1852년 ~ 1868년)
선대: 마쓰다이라 가타타카
후대: 마쓰다이라 노부노리
교토 수호직임기 1: 1863년 ~ 1864년
선대: 없음
후대: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임기 2: 1864년 ~ 1867년
선대: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후대: 없음

2. 약력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1836년 2월 15일(덴포 6년 12월 29일) 에도 요츠야에 있는 다카스 번 저택에서 다카스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쓰(松平義建)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2][30] 어머니는 측실 고모리씨이다.[30] 어린 시절 이름은 케이노스케(銈之丞)였다.[4]

다카스 번은 작은 영지였지만, 도쿠가와 씨족의 분가라는 지위 덕분에 높은 위신을 누리고 있었다. 가타모리는 아이즈 번(会津藩)의 8대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타카(松平容敬)의 양자로 입적되었다.[4] 1846년 4월 27일, 가타모리는 가타타카의 양자가 되어 와다쿠라몬 안, 아이즈 마쓰다이라가 조상 저택으로 맞이해졌다.[31] "아이의 모습이 좋다"고 아이즈가의 남녀가 소란을 피울 정도로 미남 소년이었다고 전해진다. 양아버지인 가타타카로부터 아이즈 가풍에 기반한 교육을 받았는데, 신도(경신숭조에 있어서의 황실 존숭), 유교에 의한 "의"와 "리"의 정신, 그리고 아이즈번 가훈에 의한 무가의 동량인 도쿠가와가에 대한 절대 순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후에 가타모리의 행동 지침이 되었다.[31]

1851년, 가타모리는 아이즈로 가서 문무를 닦고, 닛신칸(日新館)에서 문무 연습을 숙달했다.[32] 1856년에 가타타카의 딸 도시히메(敏姫)와 결혼했다. 입적 후, 가타모리는 양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 "가타모리"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입적 4개월 후 쇼군(将軍)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와 타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에게 소개되었고, 그 해 말에는 와카사노카미(若狭守)라는 관직(官職)의 명예직위를 받았다.[5]

1852년 양부 마쓰다이라 가타타카가 사망하면서 아이즈번의 번주가 되었다.[7][33] 번주 취임 후, 아이즈번의 군사력 강화와 서양식 군제 도입에 힘썼다. 9대 번주로서 히고노카미 칭호를 받았으며,[7] 궁정으로부터 사콘노에곤쇼쇼(사콘노에곤쇼쇼/左近衛権少将일본어) 칭호를 추가로 받았다. 그 해 말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했다.[7]

1853년 4월,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아와, 카즈사의 경비 지역을 순시하고 군사 훈련과 배의 운용을 살폈다.[33] 같은 해 10월, 아이즈번은 시나가와 제2포대 관수를 명령받았다.[33] 1854년에는 덴메이(장군의 명령)에 따라, 코마바야마에서 로쥬·와카토시키리에게 번사 1000명 이상을 이끌고 훈련을 보였다.[32]

1855년 10월 2일, 대지진으로 와다쿠라 저택·시바 저택이 소실되고 165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자,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구제에 힘썼다.[32] 1859년 9월, 시나가와의 수비를 해제하고, 에조지의 수비를 명령받았다.[33]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초기 몇 년간 그의 영지 통치는 힘든 시기를 맞았다.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이 페리 원정을 이끌고 에도 만으로 들어와 일본이 수 세기 동안 유지해 온 쇄국 정책을 종식하고 미국과의 무역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막부는 광범위한 연합 봉건 영지에서 대규모의 병력과 함선을 동원했고, 아이즈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즈는 페리 원정 전 몇 달 동안 이미 가즈사와 아와 해안 지역의 경비를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페리 제독이 일본 관리들과 만나러 상륙했을 때 아이즈는 경비정과 해안 경비를 제공한 영지 중 하나였다.[7] 페리 원정의 통역관이었던 새뮤얼 웰스 윌리엄스는 “오늘 해안에서 본 깃발들 중 일부와 붉은 재킷에도 會(ai)자가 있었다.”라고 기록했다.[8]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1862년 막부의 고위 관리들이 존황양이(尊王攘夷) 급진파의 영향을 받고 있던 교토의 치안 회복을 목적으로 신설한 교토 수호직(京都守護職)에 임명되었다.[9][35] 교토 수호직 설치는 이전까지 교토에서 최고 권력자였던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가 치안 유지에 어려움을 겪자, 기존 구조 위에 군사력을 통해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10]

가타모리는 고메이 천황을 배알하고 존황양이파와 대화를 통한 조정을 시도하는 방침으로 교토를 다스렸다.[43] 그러나 1863년 2월 22일 발생한 아시카가 목상효수사건을 계기로 정책을 180도 전환, 공무합체파 및 존황양이파를 적대하게 된다.[44][45] 이후 신센구미의 전신인 로시구미(浪士組)를 조직하여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경호와 교토의 치안 유지를 맡겼다.[45]

1864년 6월 5일, 신센구미가 이케다야 사건을 일으켜 교토 대화재를 미연에 방지하고, 존황양이파의 주요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금문의 변을 일으킨 조슈번에 대항하였다.[109]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메이지 정부군에게 패배한 가타모리아이즈번으로 돌아왔다.[26] 번내에서는 항전파와 항복파가 대립하였지만, 가신 대부분이 무장 항전을 지지하였다. 가타모리는 가신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항전을 결정했다.[86]

1868년 2월 4일, 가타모리는 오사카 탈출의 책임을 지고 번주를 사임하고, 가독을 양자인 요시토쿠에게 양도했다. 2월 15일, 가타모리는 번병 전원을 에도의 와다쿠라 저택에 모아, 토바·후시미 전투에서의 분전을 위로하고, 동시에 자신의 오사카성 탈출을 사과하고, 아이즈를 회복하고 싶다고 번사들을 격려했다. 2월 16일, 아이즈·쿠와나를 조적이라고 하는 칙령이 내려지고, 요시노부로부터 에도성 등성 금지와 에도 추방을 통고받는다. 가타모리는 에도를 떠나 2월 22일 아이즈에 도착하여 긴신하며 조정의 명을 기다렸다.

3월, 오슈 진무 총독 구죠 미치타카는 참모 세라 슈조 등과 함께, 도호쿠 여러 번에 대해 아이즈·쇼나이의 정벌을 명령했다.[86] 오슈 진무 총독부는 아이즈 번을 관전에 처할 의사를 전하고 항복을 권고했지만, 아이즈는 “사죄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86] 윤4월 12일, 센다이 번·요네자와 번에 의한 아이즈 구제 탄원이 있었지만,[87] 아이즈 번이 이를 거부하고, 세라 슈조가 살해당하면서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88] 5월, 도호쿠 지방의 34개 번으로 구성된 오슈우에쓰 렬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이 성립되었다.

7월 13일 이와키 평성(磐城平城), 26일 미하루 번(三春藩), 29일 니혼마쓰 성(二本松城), 29일 나가오카 성(長岡城)이 함락되었다. 8월 21일, 아이즈번은 각 국경에 주력을 배치하여 방어에 임했으나, 모나리토게 전투(母成峠の戦い)에서 동군(東軍)이 패배했다. 8월 23일, 토노구치하라 전투(戸ノ口原の戦い)에서 동군이 무너지고, 서군이 와카마쓰(若松) 성하에 침입하여 농성전이 시작되었다.

아이즈 전쟁에서 아이즈번의 가신들은 부녀자와 아이에 이르기까지 싸우거나 자결을 선택하며 많은 비극을 낳았다. 사이고 요리모(西郷頼母)의 가족을 대표로 하는 부녀자의 자결은 140가구 239명에 달했고, 백호대의 이이모리야마 자결, 나카노 타케코(中野竹子)를 비롯한 여자대(娘子隊)의 전투 등이 발생했다.

9월 22일, 메이지 신정부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아이즈번은 항복하고, 쓰루가성(鶴ヶ城)이 함락되었다. 가타모리는 묘코쿠지(妙国寺)로 옮겨졌다.[26]

메이지 13년(1880년) 닛코 동조궁의 궁사(宮司)가 되고, 종삼위를 서임받았다.[111] 메이지 26년(1893년) 12월 5일 도쿄 메구로의 자택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112] 향년 59세. 죽기 전날 메이지 천황에게서 우유를 하사받았다. 묘소는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 마쓰다이라 가 신사 및 도쿄도 신주쿠구 쇼주인이다.

메이지 2년(1869년) 5월, 가로(家老) 가야노 나가노리가 전쟁 책임을 지고 자결하였고, 11월에는 맏아들 가타하루의 가문 승계가 인정되어 화족이 되었다.[111] 자작 작위를 받고, 무쓰국 3만 석의 영지를 지배하도록 명령받았다. 메이지 3년(1870년)에는 토난번 지사에 임명되었다. 메이지 5년(1872년) 1월, 가택 연금이 풀렸다.

메이지 13년(1880년) 2월, 닛코 도쇼구의 궁사에 임명되었다. 3월에는 우에노 도쇼구 사관을 겸임하고 보광회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6월에는 쓰쓰 신사의 사관을 겸임하였다.

메이지 26년(1893년) 12월 5일, 도쿄시고이시카와구다이록텐정 8번지(현재의 분쿄구코히나타 1정목) 자택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59세. 신호는 충정영신(忠誠靈神). 옛 나이토 신주쿠 근처의 쇼주인에 신도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1928년(쇼와 3년,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60년째), 秩父宮雍仁親王(다이쇼 천황의 제2황자)과 雍仁親王妃勢津子(마쓰다이라 쓰네오의 장녀)의 혼례가 거행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1836년 2월 15일(덴포 6년 12월 29일) 에도 요츠야에 있는 다카스 번 저택에서 다카스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쓰(松平義建)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2][30] 어머니는 측실 고모리씨이다.[30] 어린 시절 이름은 케이노스케(銈之丞)였다.[4]

다카스 번은 작은 영지였지만, 도쿠가와 씨족의 분가라는 지위 덕분에 높은 위신을 누리고 있었다. 가타모리는 아이즈 번(会津藩)의 8대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타카(松平容敬)의 양자로 입적되었다.[4] 1846년 4월 27일, 가타모리는 가타타카의 양자가 되어 와다쿠라몬 안, 아이즈 마쓰다이라가 조상 저택으로 맞이해졌다.[31] "아이의 모습이 좋다"고 아이즈가의 남녀가 소란을 피울 정도로 미남 소년이었다고 전해진다. 양아버지인 가타타카로부터 아이즈 가풍에 기반한 교육을 받았는데, 신도(경신숭조에 있어서의 황실 존숭), 유교에 의한 "의"와 "리"의 정신, 그리고 아이즈번 가훈에 의한 무가의 동량인 도쿠가와가에 대한 절대 순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후에 가타모리의 행동 지침이 되었다.[31]

1851년, 가타모리는 아이즈로 가서 문무를 닦고, 닛신칸(日新館)에서 문무 연습을 숙달했다.[32] 1856년에 가타타카의 딸 도시히메(敏姫)와 결혼했다. 입적 후, 가타모리는 양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 "가타모리"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입적 4개월 후 쇼군(将軍)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와 타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에게 소개되었고, 그 해 말에는 와카사노카미(若狭守)라는 관직(官職)의 명예직위를 받았다.[5]

2. 2. 아이즈 번주 취임

1852년 양부 마쓰다이라 가타타카가 사망하면서 아이즈번의 번주가 되었다.[7][33] 번주 취임 후, 아이즈번의 군사력 강화와 서양식 군제 도입에 힘썼다. 9대 번주로서 히고노카미 칭호를 받았으며,[7] 궁정으로부터 사콘노에곤쇼쇼(사콘노에곤쇼쇼/左近衛権少将일본어) 칭호를 추가로 받았다. 그 해 말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했다.[7]

1853년 4월,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아와, 카즈사의 경비 지역을 순시하고 군사 훈련과 배의 운용을 살폈다.[33] 같은 해 10월, 아이즈번은 시나가와 제2포대 관수를 명령받았다.[33] 1854년에는 덴메이(장군의 명령)에 따라, 코마바야마에서 로쥬·와카토시키리에게 번사 1000명 이상을 이끌고 훈련을 보였다.[32]

1855년 10월 2일, 대지진으로 와다쿠라 저택·시바 저택이 소실되고 165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자,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구제에 힘썼다.[32] 1859년 9월, 시나가와의 수비를 해제하고, 에조지의 수비를 명령받았다.[33]

초기 몇 년간 그의 영지 통치는 힘든 시기를 맞았다.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이 페리 원정을 이끌고 에도 만으로 들어와 일본이 수 세기 동안 유지해 온 쇄국 정책을 종식하고 미국과의 무역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막부는 광범위한 연합 봉건 영지에서 대규모의 병력과 함선을 동원했고, 아이즈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즈는 페리 원정 전 몇 달 동안 이미 가즈사와 아와 해안 지역의 경비를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페리 제독이 일본 관리들과 만나러 상륙했을 때 아이즈는 경비정과 해안 경비를 제공한 영지 중 하나였다.[7] 페리 원정의 통역관이었던 새뮤얼 웰스 윌리엄스는 “오늘 해안에서 본 깃발들 중 일부와 붉은 재킷에도 會(ai)자가 있었다.”라고 기록했다.[8]

2. 3.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1862년 막부의 고위 관리들이 존황양이(尊王攘夷) 급진파의 영향을 받고 있던 교토의 치안 회복을 목적으로 신설한 교토 수호직(京都守護職)에 임명되었다.[9][35] 교토 수호직 설치는 이전까지 교토에서 최고 권력자였던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가 치안 유지에 어려움을 겪자, 기존 구조 위에 군사력을 통해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10]

가타모리는 고메이 천황을 배알하고 존황양이파와 대화를 통한 조정을 시도하는 방침으로 교토를 다스렸다.[43] 그러나 1863년 2월 22일 발생한 아시카가 목상효수사건을 계기로 정책을 180도 전환, 공무합체파 및 존황양이파를 적대하게 된다.[44][45] 이후 신센구미의 전신인 로시구미(浪士組)를 조직하여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경호와 교토의 치안 유지를 맡겼다.[45]

1864년 6월 5일, 신센구미가 이케다야 사건을 일으켜 교토 대화재를 미연에 방지하고, 존황양이파의 주요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금문의 변을 일으킨 조슈번에 대항하였다.[109]

2. 4. 아이즈 전쟁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메이지 정부군에게 패배한 가타모리아이즈번으로 돌아왔다.[26] 번내에서는 항전파와 항복파가 대립하였지만, 가신 대부분이 무장 항전을 지지하였다. 가타모리는 가신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항전을 결정했다.[86]

1868년 2월 4일, 가타모리는 오사카 탈출의 책임을 지고 번주를 사임하고, 가독을 양자인 요시토쿠에게 양도했다. 2월 15일, 가타모리는 번병 전원을 에도의 와다쿠라 저택에 모아, 토바·후시미 전투에서의 분전을 위로하고, 동시에 자신의 오사카성 탈출을 사과하고, 아이즈를 회복하고 싶다고 번사들을 격려했다. 2월 16일, 아이즈·쿠와나를 조적이라고 하는 칙령이 내려지고, 요시노부로부터 에도성 등성 금지와 에도 추방을 통고받는다. 가타모리는 에도를 떠나 2월 22일 아이즈에 도착하여 긴신하며 조정의 명을 기다렸다.

3월, 오슈 진무 총독 구죠 미치타카는 참모 세라 슈조 등과 함께, 도호쿠 여러 번에 대해 아이즈·쇼나이의 정벌을 명령했다.[86] 오슈 진무 총독부는 아이즈 번을 관전에 처할 의사를 전하고 항복을 권고했지만, 아이즈는 “사죄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86] 윤4월 12일, 센다이 번·요네자와 번에 의한 아이즈 구제 탄원이 있었지만,[87] 아이즈 번이 이를 거부하고, 세라 슈조가 살해당하면서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88] 5월, 도호쿠 지방의 34개 번으로 구성된 오슈우에쓰 렬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이 성립되었다.

7월 13일 이와키 평성(磐城平城), 26일 미하루 번(三春藩), 29일 니혼마쓰 성(二本松城), 29일 나가오카 성(長岡城)이 함락되었다. 8월 21일, 아이즈번은 각 국경에 주력을 배치하여 방어에 임했으나, 모나리토게 전투(母成峠の戦い)에서 동군(東軍)이 패배했다. 8월 23일, 토노구치하라 전투(戸ノ口原の戦い)에서 동군이 무너지고, 서군이 와카마쓰(若松) 성하에 침입하여 농성전이 시작되었다.

아이즈 전쟁에서 아이즈번의 가신들은 부녀자와 아이에 이르기까지 싸우거나 자결을 선택하며 많은 비극을 낳았다. 사이고 요리모(西郷頼母)의 가족을 대표로 하는 부녀자의 자결은 140가구 239명에 달했고, 백호대의 이이모리야마 자결, 나카노 타케코(中野竹子)를 비롯한 여자대(娘子隊)의 전투 등이 발생했다.

9월 22일, 메이지 신정부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아이즈번은 항복하고, 쓰루가성(鶴ヶ城)이 함락되었다. 가타모리는 묘코쿠지(妙国寺)로 옮겨졌다.[26]

2. 5. 메이지 시대

메이지 13년(1880년) 닛코 동조궁의 궁사(宮司)가 되고, 종삼위를 서임받았다.[111] 메이지 26년(1893년) 12월 5일 도쿄 메구로의 자택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112] 향년 59세. 죽기 전날 메이지 천황에게서 우유를 하사받았다. 묘소는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 마쓰다이라 가 신사 및 도쿄도 신주쿠구 쇼주인이다.

메이지 2년(1869년) 5월, 가로(家老) 가야노 나가노리가 전쟁 책임을 지고 자결하였고, 11월에는 맏아들 가타하루의 가문 승계가 인정되어 화족이 되었다.[111] 자작 작위를 받고, 무쓰국 3만 석의 영지를 지배하도록 명령받았다. 메이지 3년(1870년)에는 토난번 지사에 임명되었다. 메이지 5년(1872년) 1월, 가택 연금이 풀렸다.

메이지 13년(1880년) 2월, 닛코 도쇼구의 궁사에 임명되었다. 3월에는 우에노 도쇼구 사관을 겸임하고 보광회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6월에는 쓰쓰 신사의 사관을 겸임하였다.

메이지 26년(1893년) 12월 5일, 도쿄시고이시카와구다이록텐정 8번지(현재의 분쿄구코히나타 1정목) 자택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59세. 신호는 충정영신(忠誠靈神). 옛 나이토 신주쿠 근처의 쇼주인에 신도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1928년(쇼와 3년,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60년째), 秩父宮雍仁親王(다이쇼 천황의 제2황자)과 雍仁親王妃勢津子(마쓰다이라 쓰네오의 장녀)의 혼례가 거행되었다.

3. 가계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마쓰다이라 요시타쓰의 아들이며, 마쓰다이라 가타타카를 양부로 두었다. 어머니는 고모리씨이다.

형제로는 도쿠가와 요시카쓰(제14대, 제17대 오와리번주), 마쓰다이라 다케나리(제3대 하마다 번주), 도쿠가와 모치나가(제11대 다카스 번주, 제15대 오와리번주 , 제10대 히토쓰바시가 당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제4대 구와나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케(제13대 다카스 번주) 등이 있다. 의자매로는 데루히메 (이노 번주 호시나 마사모토의 딸이자 마쓰다이라 가타타카의 양녀, 나카쓰번주 오쿠다이라 마사모토의 정실)가 있다.

정실은 마쓰다이라 가타타카의 딸 사토히메로, 14세에 가타모리와 혼인했지만 19세에 사망했다.

자녀로는 장남 마쓰다이라 가타하루, 차남 마쓰다이라 다케오(이사스미 신사 제관), 5남 야마다 히데오(야마다 백작가의 데릴사위), 6남 마쓰다이라 쓰네오(주영 대사 역임, 도쿠가와 종가 18대 도쿠가와 쓰네나리의 조부), 7남 마쓰다이라 모리오(해군 소장 역임) 등이 있다. 양자로는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19남 마쓰다이라 노부노리가 있다.

수시영 회견. 후열 왼쪽 네 번째가 다섯째 아들 히데오, 중단 왼쪽 두 번째가 노기 마레스케


4. 평가 및 논란

섬세한 얼굴에 단정한 미남자 같은 용모로, 교토 수호직(京都守護職) 곤보(容保)가 궁중에 참내하자 여관들이 술렁였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교토 미마와리구미(京都見廻組)는 교토 수호직(京都守護職)이었던 곤보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근에야 사건(近江屋事件)에 대해 이소다 미치후미(磯田道史)는 "(미마와리구미 여두) 사사키 타다사부로(佐々木只三郎)의 형으로 아이즈 번 공용인이었던 테데기 나오에몬(手代木直右衛門)이 마쓰다이라 곤보의 명으로 사사키에게 실행시켰다"고 테데기가 기록한 서류를 근거로 지적하고 있다.[99]

가신들로부터 인망이 두터웠고, 와카마쓰 성(若松城) 개성 후 에도(도쿄(東京))로 호송되는 곤보를 가신들은 단장의 심정으로 배웅했다고 한다. 반면, 백성들에게는 중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영민들의 원한을 샀고,[100] 배웅하러 온 영민은 거의 없었으며, 농민들에 이르러서는 호송되고 있는 번주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 당시 종군의사로서 그 모습을 본 윌리엄 윌리스(ウィリアム・ウィリス)는 "마쓰다이라 곤보나 그 가신들이 사면을 받더라도, 지배자로서 아이즈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수첩에 적고 있다.[101][102]

메이지 시대가 되어, 곤보의 친형인 구 오와리 번(尾張藩)주 도쿠가와 요시카쓰(徳川慶勝)로부터 곤보에게 오와리 도쿠가와가(尾張徳川家) 상속 이야기가 제기되었지만, 곤보는 사퇴했다. 구신 야마카와 히로시(山川浩)가 곤보에게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의 불덕으로 일어난 막말의 혼란으로 고난을 겪은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면, 자신만 아이즈를 떠나 다른 집안을 잇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103]

메이지 26년(1893년), 고메이 천황(孝明天皇)의 비였던 구죠 슈쿠시(九条夙子)는 곤보의 병이 무겁다는 것을 듣고, 곤보의 주치의이자 궁중의 시의두이기도 했던 하시모토 쓰네쓰네(橋本綱常)를 통해, 당시 영양에 좋다고 여겨지던 고급품이었던 우유를 선물했다. 곤보는 우유 냄새를 싫어했기 때문에, 황태후는 향료를 첨가하도록 지시했고, 쓰네쓰네는 커피를 첨가한 우유를 병에 담아 마쓰다이라가에 가져갔다. 곤보는 시녀에게 부축받으면서 병상에 일어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을 마셨다고 한다.[104]

아이즈 마쓰다이라가는 곤보의 장남 요다이가 자작이 되었지만, 야마카와 켄지로(山川健次郎)의 분주가 실을 맺을 때까지 재정은 어려웠다. 구신들은 수입에서 일부를 헌상하여 구주가를 계속 지지했다.

반다이산(磐梯山)이 분화했을 때, 구령의 이나와시로(猪苗代), 우라반다이(裏磐梯)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다. 구신 니시 타다요시(西忠義)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은 곤보는 현지로 급행하여 피해자들을 위문했다. 피해자들은 구영주의 방문을 기뻐했다.[105]

4. 1. 긍정적 평가

고메이 천황(孝明天皇)의 신임을 받으며[51], 교토 수호직으로서 막부 말기 혼란스러운 교토의 치안 유지에 기여했다.[49] 3월 11일, 급진파의 계획에 의해 가모샤(加茂社) 행행(行幸)이 이루어졌지만, 요보의 삼엄한 경계로 무사히 끝났다. 고메이 천황은 쇼군(将軍)의 믿음직함을 말했다고 요보는 듣고, 공무일화(公武一和)의 성과에 기뻐하였다[47]. 4월 11일, 이시키미즈 하치만구(石清水八幡宮)로의 행행 때 천황을 빼앗고 쇼군을 암살하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 또한 경계를 삼엄히 하여 무사히 끝났다[50].

7월 30일에는 켄춘몬(建春門) 밖에서 번병(藩兵)의 훈련을 천람(天覧)에 제공했다. 고메이 천황은 이를 칭찬하였고[52], 8월 5일, 다시 천람에 제공한 후 요보는 천황의 어거(御車) 근처로 불려져 예감(叡感)의 조서(詔)를 받았다.[52]

6월 25일, 교토 수호직(京都守護職)에게 에도로 내려가라는 칙명이 내려왔지만, 이는 요보와 아이즈 번을 교토에서 멀리 하려는 급진파에 의한 위칙(偽勅)이었다. 고메이 천황은 이 상황을 크게 우려하여 전관백(前関白) 코노에 타다히로(近衛忠熙)를 통해 요보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는데, “지금 수호직을 동하하게 하는 것은 짐의 조금도 바라지 않는 바이며, 교만하고 방자한 자가 한 위칙이며, 이것이 진칙이다. 앞으로도 그들은 위칙을 발할 것이므로 진위를 살피도록 하라. 짐은 가장 아이즈를 의지하고 있다”라고 하였다.[51]

사월팔일의 정변 당시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받은 신한(宸翰)(고메이 천황 신한(孝明天皇宸翰))에는 교토 수호직인 요보(容保)의 직무 정려를 기리는 글이 있으며, 고메이 천황이 요보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준다.

가신들과 백성들을 아끼는 어진 번주였다는 평가도 있다. 가신들로부터 인망이 두터웠고,[100] 메이지 시대가 되어, 친형인 도쿠가와 요시카쓰(徳川慶勝)로부터 오와리 도쿠가와가(尾張徳川家) 상속 이야기가 제기되었지만, "자신의 불덕으로 일어난 막말의 혼란으로 고난을 겪은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면, 자신만 아이즈를 떠나 다른 집안을 잇는 것은 할 수 없다"며 사퇴했다.[103] 반다이산(磐梯山)이 분화했을 때, 구령의 이나와시로(猪苗代), 우라반다이(裏磐梯)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구신 니시 타다요시(西忠義)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은 곤보는 현지로 급행하여 피해자들을 위문했고, 피해자들은 구 영주의 방문을 기뻐했다.[105]

1893년, 고메이 천황(孝明天皇)의 비였던 구죠 슈쿠시(九条夙子)는 곤보의 병이 무겁다는 것을 듣고, 당시 영양에 좋다고 여겨지던 고급품이었던 우유를 선물했다. 곤보는 우유 냄새를 싫어했기 때문에, 황태후는 향료를 첨가하도록 지시했고, 곤보는 시녀에게 부축받으면서 병상에 일어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을 마셨다고 한다.[104]

4. 2. 부정적 평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보신 전쟁에서 구 막부군의 중심인물로서, 메이지 신정부에 저항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비판을 받는다.[100][101][102] 백성들에게 중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영민들의 원한을 샀으며,[100] 와카마쓰 성(若松城) 개성 후 에도(도쿄(東京))로 호송될 때 배웅하러 온 영민은 거의 없었고, 농민들은 호송되는 번주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101][102] 당시 종군의사였던 윌리엄 윌리스(ウィリアム・ウィリス)는 "마쓰다이라 곤보나 그 가신들이 사면을 받더라도, 지배자로서 아이즈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수첩에 적었다.[101][102]

5. 대중문화 속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시바 료타로의 소설 『왕성의 호위자』, 호시 료이치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에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꽃의 생애』(1963년), 『가쓰 가이슈』(1974년), 『사자의 시대』(1980년), 『날아오르는 것처럼』(1990년), 『도쿠가와 요시노부』(1998년), 『신선조!』(2004년), 『아쓰히메』(2008년), 『료마전』(2010년), 『야에의 벚꽃』(2013년), 『사이고돈』(2018년), 『푸른 하늘을 꿰뚫다』(2021년) 등 다수의 작품에서 등장했다.

그 외에도 『타오르는 백호대』(TBS, 1965년), 『백호대』(일본TV 계열, 1986년), 『고료각』(일본TV 계열, 1988년), 신선조·이케다야의 혈투(TBS, 1992년), , 『백호대』(TV아사히 계열, 2007년), 『백호대~패하지 않는 자들』(TV도쿄, 2013년) 등의 드라마에 등장했다.


  • 막말순정전(각시네마, 1991년) - 배역: 에노키 다카아키(榎木孝明)
  • 유신의 폭풍 - 모든 시나리오에서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다.
  • 부치기레!(ジェノスタジオ(제노스튜디오), ツインエンジン(트윈엔진), 2022년) 목소리 - 시라이 유스케
  • 역사 로맨스 낭독 CD 성 이야기: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와 아이즈와카마쓰 성 (코즈믹레이, 2013년)[106]
  • 피안사자의 입성 (화춘주조(花春酒造), 2014년)[107]

5. 1. 주요 작품

시바 료타로의 소설 『왕성의 호위자』, 호시 료이치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에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꽃의 생애』(1963년), 『가쓰 가이슈』(1974년), 『사자의 시대』(1980년), 『날아오르는 것처럼』(1990년), 『도쿠가와 요시노부』(1998년), 『신선조!』(2004년), 『아쓰히메』(2008년), 『료마전』(2010년), 『야에의 벚꽃』(2013년), 『사이고돈』(2018년), 『푸른 하늘을 꿰뚫다』(2021년) 등 다수의 작품에서 등장했다.

그 외에도 『타오르는 백호대』(TBS, 1965년), 『백호대』(일본TV 계열, 1986년), 『고료각』(일본TV 계열, 1988년), 신선조·이케다야의 혈투(TBS, 1992년), , 『백호대』(TV아사히 계열, 2007년), 『백호대~패하지 않는 자들』(TV도쿄, 2013년) 등의 드라마에 등장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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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문서 容保の隠居後に、養嗣子の松平喜徳が家督を継ぎ会津藩主になったとみなすかどうかについては、見方が分かれる。
[30] 서적 京都守護職始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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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서적 京都守護職始末
[80] 문서 이 시점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아직 쇼군에 취임하지 않았다. 8월 20일에 도쿠가와 종가의 상속만을 행하고, 12월 5일에 쇼군 선하를 받고서야 비로소 쇼군에 취임하고 있다.
[81] 서적 京都守護職始末
[82] 서적 京都守護職始末
[83] 서적 京都守護職始末
[84] 웹사이트 守護職所司代ヲ廃シ松平容保松平定敬ニ命シ禁門ノ警衛ヲ罷メ速ニ帰国セシム https://www.jacar.go[...]
[85] 서적 昔夢会筆記
[86] 웹사이트 防長回天史 第6篇上 246頁 https://dl.ndl.go.jp[...]
[87] 서적 戊辰戦争 敗者の明治維新
[88] 문서 그러나 아이즈번도 센다이번과 미토번에 의한 공순, 개성의 설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등 강경한 태도였다.
[8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7-12-28
[9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3-12-06
[91] 서적 戦死 インパール牽制作戦
[92] 문서 당시의 관습으로는, 약혼, 막부의 인가, 결납을 거치고 있으면, 혼례의 일부는 성립하고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계도상은 계실로 기록된다.
[93] 서적 七年史
[94] 서적 会津こぼれ草 美男におわす松平容保 1952
[95] 서적 京都守護職始末
[96] 서적 新島八重子刀自懐古談 同志社談業
[97] 서적 〇藩公の御帰城に関する領内民衆の請願書 会津史談会誌
[98] 간행물 戊辰戦争後の松平容保―御小姓が記録した後半生― 福島の進路 2015-04
[99] 서적 龍馬史 文藝春秋 2010
[100] 문서 아이즈 전쟁에 의해서 번내를 전화에 휘말린 것도 재앙했다.
[101] 서적 英国公使館員の維新戦争見聞記
[102] 문서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어사면 귀성」의 청원서가 영민으로부터 다수 제출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어, 반드시 영민으로부터 싫어하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103] 서적 14 忠誠神君の御逸事 男爵山川先生遺稿
[104] 서적 15 英照皇太后陛下より忠誠神君へ牛乳を賜りしこと 男爵山川先生遺稿
[105] 서적 西忠義翁徳行録
[106] 웹사이트 歴史ロマン朗読CD「城物語 松平容保と会津若松城」 - COSMICRAY http://www.cosmicray[...] 2016-05-24
[107] 웹사이트 ドラマCD「彼岸獅子の入城」(追加情報あり) http://www.moeno.sak[...] 萌えの桜 2014-10-08
[108] 문서 무로마치 막부 쇼군 3명의 목상 훼손 사건
[109] 문서 1864년 조슈 번의 궁중 습격 사건
[110] 문서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17남과 모리야마번주
[111] 문서 이케다 요시노리 (에도 시대)
[112] 문서 수억 엔 이상의 가치를 지닌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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